양극성 장애란 무엇입니까?또한 조울증으로 알려진 양극성 장애, 우울증 , 조증의 최고 우울증의 저점 사이에 스윙 기분을 포함하는 만성적으로 반복되는 조건이다. 우울증은 질병의 가장 보편적 인 특징입니다. 조증 단계는 일반적으로 행복감이 있거나없는 과민성, 분노 및 우울증 의 혼합을 포함합니다 . 행복감이있을 때, 그것은 다른 행동들 중에서도 과잉 지출 또는 무질서한 시합에서 튀어 나오는 비정상적인 에너지와 과신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이 장애는 대부분 젊은 성인에서 시작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에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오진이 일반적입니다. 상태는 종종 주의력 결핍 / 과잉 행동 장애 , 정신 분열증 또는 경계선 성격 장애 와 혼동됩니다 . 생물학적 요인은 특정 개체 내에서 장애에 취약성을 야기 할 수 있으며 수면 부족과 같은 경험은 조울증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양극성 장애에는 2 가지 주요 유형이 있습니다 : 양극성 1 및 양극성 2. 주요 우울 증상은 양극성 1과 함께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양극성 2와 함께 있습니다. 병원 치료가 필요합니다. 양극성 2를 가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경증에서 중등도이며 보통 병원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저 조증과 함께 최소 2 주 동안 지속되는 주요 우울 증상이 있습니다.양극성 장애 이해비정형 양극성의 현실양극성 장애 또는 경계선 성격 장애입니까?양극성 장애의 징후는 무엇입니까?양극성 장애의 특징은 조증입니다. 그것은 장애의 유발 에피소드 일 수 있고, 우울한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고, 수년간의 우울한 에피소드 후에 처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조증과 우울증의 전환이 갑작스럽고 기분이 빠르게 진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증의 에피소드는 양극성 장애를 우울증과 구별하는 것이지만, 사람은 조증 또는 저 조증 상태보다 우울한 상태에서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Hypomania는 기만적 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분이 좋고 생산성 과 창의성을 향상시킬 수있는 에너지의 급증으로 종종 경험된다 . 결과적으로,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잘못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조증 증상에는 큰 변화가 있지만 특징은 증가 된 에너지, 활동 및 불안; 행복감과 극단적 낙관론 ; 극심한 과민성;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는 생각, 압박 된 연설 또는 생각을 경주; 산만 함과 집중력 부족 ; 수면의 필요성 감소; 비현실적인 믿음자신의 능력과 아이디어로; 나쁜 판단; 징벌과 빠른 운전, 위험하고 증가 된 성욕을 포함한 무모한 행동; 도발적, 침해 적 또는 공격적 행동;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거부.기분이 높아지는 기간과 우울한 기분으로 번갈아가는 빈도는 사람마다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빠른 사이클링으로 알려진 빈번한 변동은 드문 일이 아니며 매년 최소 네 번의 에피소드로 정의됩니다.조증 증상에 상당한 변동이있는 것처럼, 양극성 장애에서 우울 증상의 정도 및 지속 기간에 큰 변동이 있습니다. 특징은 일반적으로 슬프 거나 불안 하거나 공허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절망감이나 비관적 감정 ; 감정 죄책감 , 무가치, 또는 무력; 섹스를 포함하여 한 번 즐겼던 활동에 대한 관심 또는 즐거움 상실 ; 에너지 감소 및 피로감 또는 "느린"느낌; 집중, 기억 또는 의사 결정에 어려움; 불안 또는 과민성; 잠들거나 잠을 잘 수 없거나 잠을 잘 수 없다; 식욕의 변화 및 / 또는 의도하지 않은 체중 감소 또는 증가; 만성 통증또는 질병 또는 부상에 의해 설명되지 않은 다른 지속적인 신체 증상; 죽음이나 자살에 대한 생각, 또는 자살 시도.조증과 우울증의 증상은 종종 "혼합"에피소드에서 함께 발생합니다. 혼합 상태의 증상에는 교반, 수면 장애 , 식욕의 상당한 변화, 정신병 및 자살 사고 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 이 때 사람은 슬프지만 활기가 넘칠 수 있습니다.연결된 주제우울증 , 매니아 , 정신병양극성 관련인지 장애 논의양극성 장애에 대한 후성 유전 학적 영향양극성 장애의 원인은 무엇입니까?유전 적 요인과 환경 적 요인 모두 양극성 장애에 취약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인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이 장애는 가족에서 발생할 수 있지만, 아무도 그 상태를 발전시킬 위험을 만들어내는 특정 유전자 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임신시 부모의 나이가 길어질수록 취약성의 기초가되는 새로운 유전자 돌연변이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영상 연구에 따르면 특정 뇌 영역의 구조와 기능에 차이가있을 수 있지만 일관성있는 차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다양한 유형의 아동 외상을 포함한 생활 사건 은 다른 질환과 마찬가지로 양극성 장애에 중요한 역할을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연구자들은 일단 양극성 장애가 발생하면 생활 사건이 재발을 촉진 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대인 관계 어려움과 학대 사건은 가장 흔히 장애를 유발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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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기능과 특징

꿈은 우리가 잠든 사이에 일어나는 특수한 정신기능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꿈꾸기 전날이라든가 그 이전에 그 사람이 생각한 것, 본 것, 기분, 인상 같은 과거의 경험과 관계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꿈꾼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꿈꾼 뒤에도 어떤 특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현재와 미래에 작용합니다. 꿈은 일반적으로 관념표상의 연결이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기억에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꿈을 하나도 안꾼다는 사람이 많지만 대개는 꿈을 꾸면서도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어떤 꿈은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현실의 사건과는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그 꿈이 현실에서 알어난 일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렇기 때문에 그 꿈에는 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종로 거리를 걸어가는데 김 선생이 저만큼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반가위서 그리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초등학생이 길에 뛰어들더니 지나가는 택시에 부딪히는것을 보았다. 꿈을 꾼 사람은 이 꿈을 꾸고 그가 전날 종로 거리를 걸어다녔고 직장동료인 김 선생과는 친한 사이인데 며칠 전에 점심을 같이 먹은 일이 있고, 교통사고에 관해서는 신문 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고 하면서 그래서 아마 이 꿈을 꾼 모양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꿈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현실에서 일어난 일과 일치한다고 해서, 그러니 이 꿈을 꾼 것 이라고 하는 것은 속단이다. 꿈을 꾼 사람은 그 전날 다른 길거리를 돌아다녔는데 왜 꼭 종로 거리가 꿈에 나타난건지를 알아야 합니다. 김 선생과는 점심을 같이했는데 어째서 꿈에서는 거리에서 만나는가. 그는 신문에서 여러 기사를 읽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교통사고 기사, 그것도 초등학생이 택시에 부딪하는 장면이 나타났는가. 그리고 며칠 전부터의 모든 경험 가운데서 어째서 서로 다른 경험이 이게 결합하여 꿈의 내용을 이루는가. 이 모든 물음이 제기될 때 우리는 이 꿈이 현실에서 나온 꿈이니까 의미가 없다고는 단정지을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서 이 모든 꿈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 많은 기억 속에서 몇가지의 특수한 표상만을 꿈이 선택하며 특수하게 엮어 나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것이 덮어놓고 무의미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잠작할 뿐이고, 이런 짐작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것은 이런 짐작을 바탕으로 한 꿈의 해석이 꿈을 꾼 사람에게 진정으로 무엇을 깨닫게 할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달려 있다. 꿈은 잘자는 동안에 기억되는 것인 만큼 무의식적인 내용을 상당히 많이 표현하고 있다. 꿈에서의 나 조차도 의식의 나와 많이 다르다. 단지 꿈의 나는 어렴풋이나마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꿈을 무의식의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의식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그때그때의 의식의 상황에 의하여 선택되고 연상과정에 흡수된 이떤 내용들이다. 꿈은 현재의 의식의 상황으로 말미암아 무의식 속에 배열된 것이며 의식의 상황을 보충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꿈이 의식의 무엇을 보충하고자 하는지를 알려면 꿈을 꾼 사람의 의식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그런 뜻에서 꿈과 객관적 현실과의 관계를 아는 것이 꿈의 이해에서 일차적으로 종요한 것이다. 감추는 것이 아니고 가르친다고 한 융의 말은 바로 꿈속에는 감추여야 할 것, 이를테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성적 욕구나 과거의 상처보다도 우리의 의식에 대하여 무언가를 알려 주는 무의식의 메시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자 하는 지향성, 또는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 의미를 이해하려면 꿈을 인과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목적론적으로도 보아야 한다. 이것은 꿈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정시현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태도이다. 인과론적 입장에서 꿈을 본다면 꿈의 내용을 과거의 어떤 원인에 대한 결과로밖에 보지 않게 된다. 이런 관찰방법은 그 해석의 단일명백성을 목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고 고정된 상징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목적론적 관찰방법은 변화하는 꿈의 상 속에서 변화하는 심리적 상황을 발견하고자 하므로 고정된 상징해석을 일삼지 않는다고 융은 말한다. 꿈은 단일성보다 다양성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융은 꿈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을 의식에 대한 보상기능 이라고 한다. 꿈의 보상작용은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의 시대에도 단순하나마 발견된다. 의사 히포크라테스는 환자가 꿈 속에서 즐겨 먹는 음식을 현실에서 제공하였는데, 그는 그것이 바로 꿈꾼 사람의 현실에서 결핍된 음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는 한국의 속설도 이와 비슷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의식이 너무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면 광에서는 게으르고 거짓말하고 탐욕스럽고 성적으로 부도덕하다고 할 만한 행위를 한다. 반면에 의식이 너무 나태하면 꿈에는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군대가 나타나서, 꿈을 꾼 사람의 자아를 뒤쫓아 오거나 혹은 그 군대와 행동을 같이한다. 이것은 모두 의식에 모자란부분을 보충하고 의식이 너무 외곬으로 나아가는 것을 수정하려는 무의식의 보상가능의 표현이다. 물론 꿈이 모두 의식의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의식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무의식적인 보상의의 정도, 보상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의식의 태도가 일방적이지 않고 적절하면 무의식은 특별히 보상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경우 꿈은 현실의 자아의 태도와 비교적 일치하게 되고 별로 대립적인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꿈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사람의 의식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서 꿈의 내용과 비교해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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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꿈의 의미

꿈의 의미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꿈에 무슨 뜻이 있는가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 시대에 꿈을 믿는 것은 미신이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속담도 있다. 꿈을 해석하는지 소설을 쓰고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는 회의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내 꿈은 언제나 맞는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용꿈을 꾸었으니 오늘은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를 걸어 보는 순진한사람도 있다. 아기를 가졌을 때 그것이 아들이냐 딸이냐, 장차 어떻게 될 아이인가를 꿈으로 점치려는 사람들도 많다. 꿈에 관한 관심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일이지만 꿈의 의미에 관해서는 시대마다 견해가 달랐다. 20세기의 한국인에게도 꿈은 어떤 사람에게는 별뜻이 없는 글자 그대로 물거품 같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이며 마귀의 유혹이며 하느님의 계시 아니면 조상과 만나는 장소이다. 꿈에 뜻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험의 문제이며 있다 없다 하는 설득의 문제가 아니다. 꿈에 대한 관조를 통하여 무엇이든 얻은 것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은 의미가있는 것이며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거나 경험하고자 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꿈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을 그러니까 무의미 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융은 이 점을 비판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면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몰이해를 그 대상에 투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꿈에 뜻이 있다면 어떤 뜻인가. 여기에도 실로 다양한 견해의 차이가 있다. 원시인에게 있어 꿈은 흔히 현실의 연장이며, 고대인에게 꿈은 신의 사자이며 예언의 수단이며, 이관념은 한국의 현대인에게도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서도 고대 그리스에서 성행하던 아스클레피우스 사원에서의 수면이라고도 한다. 꿈의 치료적인 역할을 보여 준 좋은 예로서 현대의 정신치료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병자들이 의신 아스클레피우스를 모신 사원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아바톤 이라는 신성한 건물에 들어가 잠들며 꿈에 의신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데, 여러 모습으로 신이 나타나거나 신의 처방을 따를 때 병이 치유된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저자는 그리스의 옛 도시 에피다우로스의, 지금은 주춧돌만 남은 아스클레피우스 신전 터 건너편의 작은 박물관에 고대그리스인들이 병을 고쳐 주어서 고맙다는 표시로 헌납한 대리석상과 기념비 등이 많이 전영된 것을 보았다. 또한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꿈은 환자의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구실을 하고, 인디언 부족은 병 치료에 꿈의 해석을 이용했다. 동양인에게도 꿈의 신비력과 초월적인 기능이 무척 오랜 고대부터 현재까지 인정되고 있어, 꿈은 길흉화의 점복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고 그런 의미의 해몽사전 같은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발견된다. 동양의학에서는 신체상대와 꿈의 관계를 해석하면서 꿈의 분류와 치료법을 제시 하고 있고, 한국의 실학자 중에는 꿈의 생성을 제법 현대적으로 설명한 경우가 있다. 서양의 해몽책으로 기원 2세기의 사람, 아르테미도루스의 해몽서는 매우 체계적이고 자세하여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그러나 꿈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과학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사람은 지그분트 프로이트 였다고 융은 말한다. 그리고 프로이트에게 꿈의 의미는 경험적인 것이었다. 융의 꿈의 해석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개척자적인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다만 꿈의 의미와 이에 입각한 해석방법에 관해서는 상당한 이견을 나타내고 있다. 꿈의 의미에 대한 견해는 첫째, 실제적인 필요성 때문에 가져야 하는 것이지 이론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꿈을 보는 융의 입장이거니와 경험의 방향이 다른 만큼 프로이트, 융 이외에 무의식의 존재를 좀처럼 시인하지 않는 부트비히 빈스방게, 메다르 보스 등의 현상학파도 꿈의 해석을 다른 각도에서 시도하고있다. 어쨌든 꿈의 정신치료적인 의미가 상당히 중요시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꿈의 뜻을 알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꿈은 정말 아무 뜻도 없는 것처럼보인다. 어떤 꿈은 도저히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이 꿈의 뜻은 바로 이것이다라고 단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꿈에 더욱 엉뚱한 해석을 내리는 수도 있다. 꿈은 그야말로 우리의 의식이 쉽게 닿지 않는 미지의 세계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이 미지의 세계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자기의 꿈을 들여다보고 생각해보고 또한 다른 경험 있는 사람과 함께 의논하는 오랜 경험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육 분석 과정에서, 남의 꿈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꿈에 대한 분석을 오랫동안 받고나서 비로소 다른 사람의 꿈을 보되, 이것 또한 상당한 기간 동안 분석가의 감독 아래 실시하고 그 밖의 여러 가지 다른 수련 끝에 분석가가 되면 그제서야 독립해서 다른 사람의 꿈을 분석하도록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분석가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꿈의 뜻을 훤히 아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다만 그가 경험한 만큼만 아는 것이다. 그도 계속해서 경험해 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의 꿈에 관해서는 누구나 오해하기 마련이므로, 그 뜻이 확실하지 않으면 분석가라 할지라도 다른 분석가와 그것에 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해도 모르는 꿈은 끝내 모른다. 그러므로 동숙적인 호기심에서 꿈에 대하여 맞는다 안 맞는다 이런 뜻이다 저런 뜻이다 하는 것은 고사하고, 정신 치료의 방법으로 꿈을 본다고 할 때에 충분한 경험 없이 꿈의 의미를 설명하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알게 모르게 자신을 속이는 결과가 꿈에 나타나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여러 가지 콤플렉스이고 환자의 꿈은 꿈을 꾼 사람이나 치료자의 마음속의 콤플렉스를 자극하게 되므로, 사람들은 꿈이 제시하는 실상을 보지 못하고 그 속에서 자기의 콤플렉스를 보게 되기 쉽다. 다시 말해서 그 꿈이 지니고 있는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꿈에 투사된 각자의 문제들을 꿈의 뜻이라 믿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꿈은 마치 투사를 받는 로드샤흐 심리검사의 여러 개의 도면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꿈을 앞에 놓고 사람들은 자기 문제만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제 문제임을 모르게 되므로 분석적 치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내가 무엇을 투사하고 있는가, 어디에 나의 맹점이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끝내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꿈에 어떤 뜻이 있는가 하는 것음 꿈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과 해석의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꿈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마다 꿈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다르게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관점의 차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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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기능의 인식과 자기실현

이상의 유형론에 대한 융의 학설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신의 4기능 중 정상적으로 누구나 어느 하나의 주 기능 또는 우월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열능기능을 가지고 있지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학교의 수재가 사회의 낙제생이 되는것은 이 때문이고, 인간의 능력의 총화를 저울로 잴 수 있다면 특별히 전체 정신기능이 모두 미화되었거나 혹은 모든 정신기능이 분화되었다고 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는 사실상 없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개 그 무게는 일정할 것이고 어떤 사람이 유능하다거나 무등하다는 말이 얼마나 일방적인 견지에서 내린 잘못된 편견인가를 알게 된다. 그런데 흔히 열등기능이라 하면 언제나 열등한 채로 있는 기능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열등기능은 상당 정도 분화될 수 있고, 또한 전인격의 실험을 위해서 분화되어야 할 기능이다. 열등기능의 분화발달은 자기실현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열등기능이란 무의식화된 기능으로서 무의식의 의식화가 자기실현의 핵심적인과정이고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다. 정신의 네 가지 특수 기능에 따라서 열등기능이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이상에서 언급한 복수 정신기능에 따른 유형에 관한 설명에서 명시하였다. 무엇이 자기의 열등기능인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가를 아는것이다.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지적, 비난, 비평 가운데 특히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감정 부문인가 감각 영역인가, 사고와 관련되는가 직관에 관계되는 것인가를 살펴보면 열등기능의 정체를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이 바로 나의 열등기능을 건드릴 때 나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충격을 받거나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한다. 그러므로 열등감이란 바로 열등기능의 소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런 종류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데는 열등감을 누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열등한 기능을 분화시키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다. 신경을 건드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특히 신경을 써서 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열등기능의 보상인데 주 기능과는 달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너무 과보상하면 그 기능을 주 기능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도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그러나 그 때문에 다소 경직된 상태에서 그 기능의 특성을 발휘한다. 저자가 아는 어떤 심리학자는 산문을 보다가 활자의 오식만 보면 그것이 그렇게도 신경을 건드린다고 하였다. 그는 미각이 섬세하여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었고, 옷차람은 항상 완벽하고 머리는 깨끗이 빗고 양복 윗주머니에는 늘 삼각형으로 접은 흰 손수건이 단정하게 꽂혀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세련된 도시인이라기보다 시골 신사 같은 풍모였다. 파티 같은데서 짤막한 강연을 할 때면 약간 어색할 정도로 격식을 차린 인사와 어렵고 복잡한 형용구를 써서 비유를 이야기하나, 듣는 사람의 기분을 돋우어 좌중을 웃기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보면 비상한 직관이 번득이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그는 분명히 감각형은 아니고 내향적 직관형인데 열등한 외향적 감각기능을 그렇게 보상하였던 것이다. 열등기능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저자의 경험으로는 그가 어디서 미련한가를 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약간씩 미련한 측면이 있다. 미련하다는 말처럼 열등기능과 그로 말미암은 미숙성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물론 이 말은 미숙성의 총칭이므로 어느 부부이 미련한지는 따로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열등기능은 마치 저는 다리 같다는 말을한 바 있다. 그것은 항상 성한 다리 라 할 수 있는 주 기능보다 뒤늦게 온다. 그래서 이 열등기능을 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과가 느리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쓰는 것을 귀찮아하고 빨리 할 수 있는 장기인 주 기능에 의지하므로 그만큼 열등기능의 발달이 더뎌지게 된다. 열등기능을 의식화해서 이를 발달시키려면 제2, 제3의 보조기능을 포함해서 모든 무의식적인 것의 의식화와 마찬가지로 그 기능의 열등성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자기의 약점을 보지 않으면, 그것은 언제나 약하고 열등한 상태에 있을수밖에 없다. 열등기능은 우선 열등한 상태로밖에는 자기의 모습을 달리 드러낼 수 없다. 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계속해서 그 기능으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그것은 분화된다. 가령 이성적인 사람의 미숙한 감정은 처음에는 폭발적인 정동, 화, 핀잔 등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예의에 어긋나고 파괴적인 작용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두려워 내놓지 않으면 열등기능은 그 몇 배의 파괴력으로 남에게도 해로운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도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열등기능을 포함한 무의식을 깨달아가는 데 체면 유지와 인간관계에서의 미적인 외관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적 유교의 예의규범은 최대의 적이다. 물론 이 말이 진정한 유교 정신에 내포된 극기와 책임과 의무와 사영과 성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하다. 열등가능의 의식화에는 주 기능의 일시적인 회생이 필요하다. 장기를 늦추는 일이다. 그 역시 뒤쫓아 오는 미숙한 기능이 의식에 도달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항상 이성적으로로만 생각하면 사랑의 표현조차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려는 절향이 생긴다. 눈을 감고 깊은 물 속에서 몸을 던지는 심청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의외로 바다 밑바닥에는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열등기능의 분화는 처음에 그 기능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그 의식화의 시작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일단 이 기능이 체험되면 새로 경험한 것에 대한 강한 충실감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는 그 새로 발견한 능력에 도취되기까지 한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함으로써 그는 한 걸음 더 그의 인격의 중심에 다가서기 때문이다. 열등기능은 무의식의 고태적인 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움직임으로써 신화적인것, 신성한 힘, 누멘이 함께 의식에 전달되어 의식의 자아팽창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열등기능이 언제나 열등한 작용만 하지 않고 때로 비상하게 우월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놀리적인 설명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의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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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적 유형과 역사적 현상의 변천

심리학적 유형론은 본래 인간 개인 개인의 심리적인 특성을 이해하여 가는 가운에 생긴 학설이고, 그런 만큼 사람의 마음, 특히 대인관계를 이해하는 데 쓰일 수 있는 학설입니다. 그러므로 이 학설을 예술사나 문화사 또는 정치사 같은 것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너무 기계적이고 역사의 복잡한 측면을 단순화할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도 인간의 정신과 관계없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인간 심리를 이하려면 개인을 둘러싼 문화와 그 문화를 오늘 거기 있게 한 과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사적 추이를 거칠게나마 그 움직여 가는 파장을 조감하면, 그런 작업은 물론 역사가들이 해야 할 일이고 역사의 문외한이 결코 어떤 결정적인 단정을 내릴 수없는 문제지만, 한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내향과 외향의 상호보완, 길항, 대립의 과정이 어느 정도 발견되는 것 같은 인상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한 시대의 조류 속에서 발견될 뿐 아니라 긴역사의 바닷속에서 시대와 시대 사이를 지나가는다란 파고의 변화 가운데 관측될 수 있음 직합니다. 융은 이런 것을 유형론을 적용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에서 중기에 이르는 시대의 서양이 얼마나 외향적인 사고방식에 지배된 세계인가를 여러 곳에서 지적했고 외향적 견지에서 암흑이라고 불린 중세의 서양 문화 속에서 많은 정신문화의 가치 있는 보배를 발굴함으로써 그 시대가 지닌 내적 가치를 높이 샀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서양 문명에 물들기 전의 동양 문화의 내향적 특징이 서양 근대 문화의 외향성에 비해서 얼마나 값진 것인가 하는 것도 강조하였습니다. 물론 어느 시대에나 내향적인 경향과 외향적인 경향이 공존하게 마련이지만, 그 시대 조류를 지배하는 것이 어떤 태도인가에 따라 그 조류의 특성을 내향적, 외향적이라 부르는 것은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는 유형론을 이용해서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며, 다만 유형론에서 얻은 인식과 병행되는 특징을 역사속에서도 발견하는 것에 그쳐야 하고 이를 절대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한 개인의 생애에서도 성장 시기에 따라 외향적 경향이나 내향적 경향이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강조되는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경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며 무의식적인 다른 경향으로 항상 대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청소년기에는 외부세계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며 모든 객관적 사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려 하며, 계속해서 장년기에 이르러 사회 활동을 통한 권세, 부, 지위, 명예 등 외부적인 성취를 향해 행동 합니다. 그러나 노년이 가까워 옴에 따라 사람의 관심은 다시금 안으로 향합니다. 그의 시선은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아니면 삶의 가치의 문제로 향합니다. 물론 어느 생의 시기에도 그개체의 중심이 내향적 태도인가 외향적 태도인가를 상대적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작용이 강할 때는 그 사람의 본래의 유형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역사의 조류 가운데서 발견될 수는 없는가. 서양이 19세기를 정점으로 외부 세계에의 진출과 간섭과 정복을 일삼다가 두 번의 커다란 좌절을 거쳐 동방의 지혜에 관심을 돌리며 객체우위를 탈피하고 주체를 찾으려는 내향화시기에 접어들고 있다면, 동양은 오랜 내향적 전통을 버리고 거의 극단적인 외향적 추세에 휘말려 들어가는 듯한 인상이며, 이것은 한국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향화 경향은 과거의 극단적인 내향성에 대한 반작용이기 때문에 상당히 과장되어있고 무리가 있으므로, 때로는 건전한 외향적 태도가 성취할 수 있는 실질적 성과를 거들수 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또한 한 민족의 한 시대 안에서 일어나는 주류와 이를 대상하는 다른 흐름 사이의 보완 또한 한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대극의 갈등, 상호보완의 현상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에서의 각종 종교 사이의 길항, 갈등, 상호보충은 흥미 있는 특징을 나타냅니다. 유교의 주지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던 조선조에 그 이성과 직관의 정신세계를 대상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은 샤머니즘의 원시적 감각 세계와 극적인 감정 세계였다고 생각하거니와, 이것은 남존여비의 사회에서의 열등 기능이라 할 여성의 대상적 역할과도 관련시켜 생각할 수 있는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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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형의 무의식의 태도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주관적인 것을 아주 무시하고, 객관적인 상황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건전한 외향형에서는 항상 적당한 보상을 내향적인 작업을 통해서 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장기인 객관적 현실에 대한 건설적이고 유익한 방향으로 실시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외향적인 태도가일방적으로 과장되면 외향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의식에서 배제되어 무의식에 억압되고, 이것이 오랫동안 지나치게 지속되면 의식의 태도와는 다른 여러 가지 특이한 무의식적인 경향이 생기게 되고, 뒤에는 이것이 의식을 자극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무의식은 극단적인 내향적 경향을 띠는 것이 보통인데, 무의식에 억압된 내향적 경향은 분화 발달될 기회를 잃게 되므로 억압이 오래도록 계속되고 의식에서 그것이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막으면 막을수록 미분화된 원시적 고태적 특징을 나타내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런 내향적 경향은 무의식의 가장 밑바닥의 본능적인 충동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건전한 주체적 판단이나 이에 입각한 행동이 아니고 유아적인 자기 중심적 이기적인 경향과 같은 미분화된 내향성을 강하게 띠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적인 외향적 태도가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무의식적인 태도는 유아적이고 고태적입니다. 극도의 객체지향성은 결과적으로 미구에 극도의 주관적 견해나 욕망에 의하여 지배당할 바탕을 마련하게됩니다. 무의식의 경향은 단순히 어린애 같은 유치함을 넘어서는 무자비한 이기주의와, 프로이트가 말하는 근친혼에의 욕망에까지 번지게 됩니다. 그런 뜻에서 고태적입니다. 외향형은 현재와 외적 현실에 집착하는 나머지 과거와 역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뭐라고 했는지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박합니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은 상당히 이와 같은 외향성을 띤 사상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적으로 끊어 버린 과거와 역사는 의식에서는 없어지지만, 무의식에서 연맹을 하여 그 개체를 포함한 전 인류의 과거가 하나의 요청으로서 의식의 현재주의에 대립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의 전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적 요소는그 현명한 운영을 절실히 요청합니다. 지금까지의 것은 어떻게든 새로운 것 가운데서 발언될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객체에의 전적인 동화는 억압된 소수자인 지금까지의 것,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원초적인 것의 항의에 부딪히게 됩니다. 또한 무의식은 오직 욕구일 뿐이라고 프로이트가 주장한 것은 사실 극단적인 외향형의 무의식의 경향에 부합된다고 융은 말합니다. 이렇게 외향형의 의식적 태도에 상반되는 무의식적인 경향이 적절한 대상의 정도를 넘어서서 의식에 대하여 거의 적대적인 반작용을 하기 시작하면, 외향형 자신도 전혀 깨닫지 못한 가운데 의식의 태도와는 모순된 무의식적 경향이 의식 표면에 나타나 그의 행위는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됩니다. 객관적 규준에 의하여 공정무사하게 사무를 처리하며 항상 남과 사회를 위하여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때때로 내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해치우려는 끝없는 아집과 횡포를 부려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그 사람의 어느 것이 의식적 태도이고 어느 것이 무의식적 태오인지를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누가 무슨 유형에 속하는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의식의 외향적 태도가 무의식의 열등한 내향적 태도에 어떻게 동화되어 가는가를 융은 한 출판사 주인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20년 동안 남의 점원 노릇을 하며 고된 일을 해오다가 독립하여 장래가 유망한 회사의 경영주가 되었고, 그의 회사는 점점 번창하여 이 사람의 사적인 관심은 전적으로 사업을 위해서 희생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회사의 확장과 경영이라는 외부적 작업에 의해서 억눌린 내적인 관심은 무의식에서 대상적으로 강해져서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 점차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그리하여 그림의 취미를 따로 키워 가지 않고, 그가 내 놓은 책들의 예술적인 장정을 꿈꾸게 되어, 이 꿈을 실현하려고 그의 유치한 추미에 맞게 책의 모양을 내기 시작했는데 그만 수 년 후에 그 때문에 회사가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는 똑같은 경우는 아니라 하더라도 한국현대의 많은 기업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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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향형의 의식의 일반적 태도

앞서 말한 것처럼 중요한 결정이나 행동의 대부분이 주체의 의견에 의하지 않고 객관적인 상황에 의해서 좌우될 때 이를 외향적 태도라 하고, 이런 외향적 태도가 습성화되어 그의 생활의 일정한 특징을 이루면 그를 외향형이라 부릅니다. 누구나 살아 나가자면 외계가 제공해 주는 자료들에 따라서 자기 태도를 결정하지만 그 결정하는 양식이나 동기가 다릅니다. 외향형은 늘 객체에 맞추고 객체에 부합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판단해 가는 경향이 강한것이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의 생각, 느낌, 행동의 방법, 즉 사는 법이 좋든 나쁘든 객관적인 사정이나 객관적 상황에서 오는 여러 가지 요구에 직접 부합되는 것이면 그 인간은 외향적입니다. 물론 외향형이라고 해서 주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관보다는 객체에서 의식의 대의식의 일반적 태도를 결정하는 힘이 강하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외계를 향합니다. 내적인것은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 눌립니다. 다소 갈등이 있어도 언제나 최후에는 객관적인 조건에 알맞은 결정을 내립니다. 그의 관심과 주의력은 객관적인 사물이나 다른 사람들에 집중됩니다. 그의 행동은 또한 객관적인 사물이나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주는 영향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곧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먼 미래보다 현재의 가장 가까운 주변의 사건들을 추구합니다. 도덕적인 행동 기준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 요구, 즉 일반적인 도덕관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일반적인 도덕관이 바뀌면 자기의 행동 기준도 바뀝니다. 그 때문에 큰 갈등을 겪지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향형으로부터 곧잘 기회주의자, 지조가 없는 사람, 뼈대가 없다느니 비겁하다는 등 비난을 받기 쉽습니다. 물론 외향향은 그렇게 말하는 내향형에게 이해할 수 없는 고집불통, 시류 를 외면하는 보수주의, 이기주의자, 독선가 라고 응수하기 마련입니다. 외향형의 이와 같은 객체 위주의 태도를 과연 훌륭한 적용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하고 융은 반문합니다. 재빠르게 현실에 뛰어들어 그것과 호흡을 같이하기 때문에, 현실에 뛰어들지 못하고 원칙이니 이상이니를 내세워 현실 비판만 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응능력이 강하다고 할 법합니다. 그러나 융은 말합니다. 그는 순응은 하지만 적응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적응이란, 직접적인 주변의 그때그때의 조건에 아무 마찰 없이 맞추어 가는 것 이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적응은 지역적, 시대적 조건보다 더 보편적인 법을 관조하기를 요구합니다. 보다 높은 견지에서 볼 때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반드시 이떤 경우에나 정상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이 비정상적이면 외향형은 순응 태도로 인해 곧바로 환경의 비정상성에 부합되는 행동을 하게 되고, 그는 사회와 함께 보편적인 생명법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가 똑같이 멸망하게 됩니다. 그는 정확하게 사회에 순응하나 또한 이와 꼭 같이 정확하게 사회와 더불어 파멸합니다. 여기에 외향형의 제약이 있다고 융은 말합니다. 외향형은 객관적인 가능성을 추구하여 당장 그때그때 장래성이 있는 직업을 택하거나, 당장 주위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을 합니다. 그는 주위의 기대가 있는한 변혁을 과감하게 실천하지만, 그것이 주위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면 변혁을 피합니다. 그는 명랑하고 사교적이고 자유스럽게 주위 환경에 작용하고, 주변으로부터의 작용도 거절하지않고 받아들입니다. 외향형은 외향적인 태도가 일방적으로 극단화될 때 자기의 주체를 소홀히 할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사실로서 가장 소홀히 여겨지는 것은 신체입니다. 이것은 그에게는 외적이고 객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외향적 태도가 너무 지나치면 신체가 고통을 받는데, 대개 외향형은 이상한 신체 감각이 나타나야 비로소 여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외향형의 성격상 모든 것을 구체적, 객관적으로 보는 버릇이 있으므로 신체 증상도 그렇게 봅니다. 다른 한편 외향형은 지나치게 객체에 순응하는 나머지 객체에 흡수되어 모든 주관적인 것을 잃어버릴 위험을 갖습니다. 주관적인 것은 의식에서 배제되어 무의식에 억압되고 분방한 환상작용으로 의식을 괴롭히게 됩니다. 평소에는 아주 활달하고 적극적이고 남자답다고 하는 사람이 건강에 대하여 병적으로 염려하기 시작하고 신체기관의 조그마한 이상에도 놀라는가 하면 그 사람답지 않게 암이 아닐까 하는 공상에 사로잡하는 경우, 우리는 그의 외향적 태도가 너무 극도에 이르러 이제 다른 것으로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체적 이상은 흔히 일방적 외향적 태도의 무의식적 보상작용의 하나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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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태도의 유형

융은 심리학적 유행을 두 가지 측면에서 보는데, 첫째는 일반적인 태도상에서 보는 유형으로 내향적 태도, 의향적 태도를 말합니다. 둘째는 정신의 각 특수기능을 중심으로 그중 적응 과정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분화된 기능에 따라 구분하는 유형입니다. 이를 기능유형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먼저 앞의 것을 다루기로한다. 흔히 내향적인 태도는 수줍고 비사교적인 태도, 외향적인 태도는 사교적이고 활발한 사람의 태도를 두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통속적인 해석이고 단지 그 개념의 한 면만을 지적한 말입니다. 내향적, 외향적 태도의 구별은 그 개체의 주체와 객체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내릴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태도가 객체를 주체보다 중요시하면 그는 외향적 태도를 취한다고 말할 수 있고, 반대로 객체보다 주체를 중요시하면 그는 내향적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는 것이 주로 객체일 때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며, 그사람의 판단의 기준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객체보다도 주체이면 그의 태도는 내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술 전시회에 가서 그 그림이 좋다고 말할 때, 전날 본 신문의 평에서 그 그림이 좋다고 하였고 화가들이 유명한 사람이어서 객관적으로 좋다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라면, 그의 태도는 외향적입니다. 그는 객관적 기준에 따라서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문의 평이 좋고 그 화가가 세상에 잘 알려져 있다고 해도, 내가 보기에는 좋지않았다고 한다면 그의 태도는 내향적입니다. 그의 판단의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이기보다 자기의 주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하니까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외향적 태도이고, 아무리 모든 사람이 좋다고 해도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고 한다면 그의 태도는 내향적 태도입니다. 내향적 태도와 외향적 태도가 반드시 의견의 차이를 초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와향형과 내향형은 간혹 완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고 서로 좋아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견의 전제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좀 더 대화를 진행하면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두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령 음악을 좋아하는 외향형과 내향향이 서로 만나서 음악 이야기에 꽃을 피웠다고 한다면 두 사람은 먼저 서로 같은 취미를 가진 것에 반가워합니다. 누구의 곡이 좋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데까지는 별 마찰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외향형의 사람은 음악가의 생활사 객관적 명성, 유명한 외국 비평가의 연주평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내향형의 사람은 음악에 대한 자기의 느낌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외향형은 내향형인 상대방이 의의로 음악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다고 실망하고, 내향형은 외향형인 상대방이 공연히 지식만 늘어놓고 아는 체하지만 실상 전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는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씁쓰레한 기분으로 찻집 문을 나겁니다. 외향형, 내향형이란 위에 말한 외향적 태도와 내향적 태도가 각각 그 사람의 전 생애를 통해서 거의 하나의 생활상의 습성법이 되었을 때를 두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은실상 모두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다만 내향형은 주체를 지키는 데 적극적이고 객체를 소홀히하는데, 외향형은 객체를 따르는 데 적극적이고 주체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다릅니다. 이것을 융은 관성 방향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외향형은 관심이 밖으로 향하며 객관세계로 뛰어들어 그것과 관계를 맺는 데 서슴지 않고, 때로는 객체를 바꾸는 데 적극적으로 간여합니다. 내향형은 객체를 주체를 위험하는 존재처럼 생각하고 밖에서 오는 자극이 조금이라도 주체를 손상하지 않도록 주체를 지키려고 합니다. 외향형은 리비도 심리적 에너지로서의 마이너스가 바깥세상, 다른 사람 등 객관세계를 향하여 흐르는 데 비해서, 내향형은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서 않고 될 수있는 대로 안에 간직하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향형에서는 리비도가 안으로, 즉 주체를 향하여 흐릅니다. 내향형은 객체에서 리비도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마치 객체의 우위성을 방지하기나 하려 하는 것처럼 합니다. 외향형은 사회 활동과 실리를, 내향형은 자기 충실과 원리 원칙을 높이 내새우고 각각 이에 관심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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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

카테고리 없음 2020. 2. 4. 01:02

자기실현

자기원형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근원적 가능성이라면, 자기실현은 이러한 가능성을 자아의식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기는 능동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자아의 결단과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하며 이것이 있음으로써 비로소 무의식과 의식과의 합일이 가능해집니다. 자기원형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상징보내서 자아로 하여금 전체로서의 생을 발휘하도록 촉구합니다. 때로는 저절로 의식에 중제를 가하여 창조적인 인격의 변환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실현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대부분각 개인의 자아의 태도 여하달려 있습니다. 자아가 무의식에 관심을 두고 그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상징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자기실현은 다른 말로 개성화 라고도 합니다. 진정한 개성을 실현한다는 뜻입니다. 그사람 자신의 전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개체가 사회적 평가나 사회적인 이상상에 맞추어 살기만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소외 또는 자기포기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다만 외부적인 역할이나 집단적인 이상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는데, 자신의 내적 추구, 자신의 개성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성화 또는 자기실현은 첫째로 집단정신과 나의 삶의목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별은 하나의 자각된 인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결코 집단정신, 페르조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개성이라든가 개성화라는 말을 쓰면 곧 사회규범을 무시하고 세속을 떠난 초속적인 세계에서 고고한생을 누리거나 아니면 개인지상주의를 말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개성화는 개인지상주의와는 다릅니다. 개인지상주의는 집단적 고리나 의무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자기의 개인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내세우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사람은 의식적으로 더욱 강하게 집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전 세계를 휩쓸었던 히피 운동이나 현대 사회의 청소년들이 그럴싸한 철학으로 꾸며진 반규범적 행동은 흔히 이런종류의 개인지상주의에서 나오는것입니다. 이것이 시대정신 개혁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개성화는 개체의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한 바탕 위에서 집단적 규범의 보다 나은 충족을 가능하게 합니다. 자아의식의 형성과 강화 및 페르조나의 형성은 한 인간의 성장 과정에 필수적인 초기의 발전 과정이며, 개성화가 그 사람의 전체를 살현하는 것인 이상 그의 모든 정산세계에는 페르소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기실현은 자아가 사회적 역할과 맹목적으로 동일시하는것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자아성숙의 궁극적인 목표가 페르조나가 아니라는 자각으로 나의 사명과 집단정신을 구별하되 사회적 의무와 규범의 필요성을 자기의 전개성에 합치되는 범위에서 인정하며, 때로는 능동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때로는 여기서물러나 안의 세계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가실현은 동속적인 의미의 성인, 군자나 도사를 만드는 과정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사회가 만들어준 성인, 군자, 도사의 탈이기 쉽습니다. 자기실현은 간단히말해서 농부를 농부로, 서양인을 서양인으로,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자기실현이 되면 될수록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갖출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원만하고 선하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속하여 있는사회의 윤리관에 비추어 그는 때로는 이기적이라는 평을 받고, 때로는 냉정하다는 평을 받고, 때로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난을 받을지 모릅니다. 때로는 무한한 정열로 이웃을 돕고, 때로는 권력의 도가니에서 싸우고, 금욕과 정욕에 사로잡히며 고민하고, 때로는 질투와 증오의 감정으로 허덕일 것입니다. 다만 그의 머리에는 집단적 두사에 의하여 생기는 명성이라는후광 없고, 구태여 스스로 그 후광을 만들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누가그것을 만들어 씌워 주면 그는 또 구태여 거부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것이 한 생에서 대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범하나 분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그가해야 할 바를 마음속에에 물으며, 이해관계에서 그것이 그가 가야 할 길이면 그렇게 갑니다 즉 그가그것 때문에 대인관계에서나 세속적인 삶에서 손해를 보게 된다 하다라도 그는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전으로 무력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와의 일치라는 점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강하다 약하다 하는 의식을 그는 가지지 않습니다. 그는 반성할 줄 알며 그런의미에서 종교적인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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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원형

카테고리 없음 2020. 2. 4. 00:37

자기원형

내마음은 내가 제일 잘 알고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과연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가. 남이 나의 허를찔러 비판하면 화부터 냅니다. 남이 잘났다고 칭찬하면 우쭐해집니다. 남이 나를 못났다고 하면 위축돼서 정말 못났다고 믿습니다. 어느 경우나 우리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못 보고 있고 정말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자기 나름의 자화상에 사로잡혀서 그는 장님이 됩니다. 바꾸어 말해서 나가 의식에만 매달리면 그가 가지고 있는 또하나의 마음의 세계, 무의식을 보지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못보고 저 잘난 맛에 또는 못났다는 생각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이렇게 반조각으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전체로서 살 것을 스스로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가 그자신으로서 살지 않고 일부로 마저 참여시켜 주기를 요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아가 의식에만 집착하면 무의식은 대상기능을 발휘하여 의식에 포함되어 전체가 되려고 합니다. 무의식 이라고 부르는 마음의 심중에는 언제나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가 되게끔 하라는 원동력이 움직이고있는 것입니다. 그가 사회와 이웃과 다른 사람의 투사와 기대에 의하여 만들어진 그의 탈이나 자아의식에 집착하여 좁고 경화된 역할 속에 기계적인 인생을 보내지않도록 그로 하여금 주어진 전 생명력을 불태우도록 촉구하는 무의식의 힘, 그 힘은 자아의식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자체의 목적에 의하여 의식에 작용합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의 전체가 되도록 자극합니다. 이것이 바로 음이 담하는 자기원형입니다.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하나인 그의 전부를 말합니다. 이것이 원형으로 다루어지는 이유는 전체가 되고자 하는 힘이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조건지어져 있다는 견해에서 온 것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에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전제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현대의 정신의학자들이 환자를 환자로서만 보지 말고 전체의 인간으로 보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전체성은 학자들이 가진 인간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융에게 전체란 의식뿐 아니라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 이상에 말한 무의식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전체입니다. 전체가 되고자 하는 경향이란 분열을 지양하고자 하는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일방적으로 의식만을 고집하면 자기로부터 멀어지며 결국 무의식과의 의식적인 관계가 상실됩니다. 그것은 두 개의 정신세계의 분열을 뜻합니다. 무의식은 이러한 단절상태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단절된 마음을 이으려고 애씁니다. 흔히 사람들이 정신적 위기에 처해있을 때 자기원형상이 출현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자기로부터의 소외와 단절, 그것은 바로 우리가 병 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병 이니 장애니 하는 것은 또 분열을 극복하게 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병의 고통 속에서 자기와의 일치가 실현되고 그가 부분으로서의 생에서 전체로서의 생을 누릴 수 있게 될 때 병은 사라지고 거기에 또한 병의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의 일치, 정신적 해리의 극복은 고통을 수반하는 하나의 창조 과정이며 결코 편안한 상태에서 이루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쩔수 없이 받아야 하는 고통의 쓴 잔이기도 합니다. 자기란 글자 그대로 그 사람 자신을 말합니다. 어느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사람의 전체를 말하다는 뜻에서 진정한 의미의 개성과 같은 말입니다. 이 개성은 의식에 나타나 있는 자아의 일회성이나 특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 무의식을 통튼 전체로서의 그 사람의 전체 성품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전부 입니다. 그 사람의 본성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람 자신이 되게끔 하는 능력이 바로 자기원형의 기능입니다. 있는 그대로 즉 여여하다는 뜻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진여의 개념과 비길 수 있습니다. 혹은 불성, 법신이 모두 같은 뜻을 가지고 있고 하나인 마음, 일심에 도달하고자 하는 불교적 추구가 모두 자기의 합일에의 지향과 같은 길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하나인 마음이란 일반적인 인간의 마음이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두고 한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Posted by 가즈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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