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기능의 인식과 자기실현

이상의 유형론에 대한 융의 학설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정신의 4기능 중 정상적으로 누구나 어느 하나의 주 기능 또는 우월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열능기능을 가지고 있지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학교의 수재가 사회의 낙제생이 되는것은 이 때문이고, 인간의 능력의 총화를 저울로 잴 수 있다면 특별히 전체 정신기능이 모두 미화되었거나 혹은 모든 정신기능이 분화되었다고 하는 경우이다. 그런 경우는 사실상 없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개 그 무게는 일정할 것이고 어떤 사람이 유능하다거나 무등하다는 말이 얼마나 일방적인 견지에서 내린 잘못된 편견인가를 알게 된다. 그런데 흔히 열등기능이라 하면 언제나 열등한 채로 있는 기능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열등기능은 상당 정도 분화될 수 있고, 또한 전인격의 실험을 위해서 분화되어야 할 기능이다. 열등기능의 분화발달은 자기실현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열등기능이란 무의식화된 기능으로서 무의식의 의식화가 자기실현의 핵심적인과정이고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다. 정신의 네 가지 특수 기능에 따라서 열등기능이 어떤 특징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은 이상에서 언급한 복수 정신기능에 따른 유형에 관한 설명에서 명시하였다. 무엇이 자기의 열등기능인가를 아는 데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이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가를 아는것이다. 다른 사람의 나에 대한 지적, 비난, 비평 가운데 특히 나의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감정 부문인가 감각 영역인가, 사고와 관련되는가 직관에 관계되는 것인가를 살펴보면 열등기능의 정체를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말이 바로 나의 열등기능을 건드릴 때 나는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충격을 받거나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한다. 그러므로 열등감이란 바로 열등기능의 소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런 종류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데는 열등감을 누르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열등한 기능을 분화시키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이다. 신경을 건드리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특히 신경을 써서 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열등기능의 보상인데 주 기능과는 달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너무 과보상하면 그 기능을 주 기능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도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그러나 그 때문에 다소 경직된 상태에서 그 기능의 특성을 발휘한다. 저자가 아는 어떤 심리학자는 산문을 보다가 활자의 오식만 보면 그것이 그렇게도 신경을 건드린다고 하였다. 그는 미각이 섬세하여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었고, 옷차람은 항상 완벽하고 머리는 깨끗이 빗고 양복 윗주머니에는 늘 삼각형으로 접은 흰 손수건이 단정하게 꽂혀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세련된 도시인이라기보다 시골 신사 같은 풍모였다. 파티 같은데서 짤막한 강연을 할 때면 약간 어색할 정도로 격식을 차린 인사와 어렵고 복잡한 형용구를 써서 비유를 이야기하나, 듣는 사람의 기분을 돋우어 좌중을 웃기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그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보면 비상한 직관이 번득이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준다. 그는 분명히 감각형은 아니고 내향적 직관형인데 열등한 외향적 감각기능을 그렇게 보상하였던 것이다. 열등기능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저자의 경험으로는 그가 어디서 미련한가를 보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약간씩 미련한 측면이 있다. 미련하다는 말처럼 열등기능과 그로 말미암은 미숙성을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 물론 이 말은 미숙성의 총칭이므로 어느 부부이 미련한지는 따로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열등기능은 마치 저는 다리 같다는 말을한 바 있다. 그것은 항상 성한 다리 라 할 수 있는 주 기능보다 뒤늦게 온다. 그래서 이 열등기능을 쓰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과가 느리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쓰는 것을 귀찮아하고 빨리 할 수 있는 장기인 주 기능에 의지하므로 그만큼 열등기능의 발달이 더뎌지게 된다. 열등기능을 의식화해서 이를 발달시키려면 제2, 제3의 보조기능을 포함해서 모든 무의식적인 것의 의식화와 마찬가지로 그 기능의 열등성을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자존심이나 체면 때문에 자기의 약점을 보지 않으면, 그것은 언제나 약하고 열등한 상태에 있을수밖에 없다. 열등기능은 우선 열등한 상태로밖에는 자기의 모습을 달리 드러낼 수 없다. 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계속해서 그 기능으로 하여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면 그것은 분화된다. 가령 이성적인 사람의 미숙한 감정은 처음에는 폭발적인 정동, 화, 핀잔 등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예의에 어긋나고 파괴적인 작용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것이 두려워 내놓지 않으면 열등기능은 그 몇 배의 파괴력으로 남에게도 해로운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도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열등기능을 포함한 무의식을 깨달아가는 데 체면 유지와 인간관계에서의 미적인 외관을 중시하는 형식주의적 유교의 예의규범은 최대의 적이다. 물론 이 말이 진정한 유교 정신에 내포된 극기와 책임과 의무와 사영과 성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님은 너무나 자명하다. 열등가능의 의식화에는 주 기능의 일시적인 회생이 필요하다. 장기를 늦추는 일이다. 그 역시 뒤쫓아 오는 미숙한 기능이 의식에 도달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항상 이성적으로로만 생각하면 사랑의 표현조차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려는 절향이 생긴다. 눈을 감고 깊은 물 속에서 몸을 던지는 심청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면 의외로 바다 밑바닥에는 죽음이 아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열등기능의 분화는 처음에 그 기능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그 의식화의 시작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일단 이 기능이 체험되면 새로 경험한 것에 대한 강한 충실감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는 그 새로 발견한 능력에 도취되기까지 한다.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화함으로써 그는 한 걸음 더 그의 인격의 중심에 다가서기 때문이다. 열등기능은 무의식의 고태적인 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움직임으로써 신화적인것, 신성한 힘, 누멘이 함께 의식에 전달되어 의식의 자아팽창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열등기능이 언제나 열등한 작용만 하지 않고 때로 비상하게 우월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도 놀리적인 설명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의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가즈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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