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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2.03 페르조나
  2. 2020.02.02 그림자
  3. 2020.02.02 무의식의 내용과 기능
  4. 2020.02.02 자아와 의식

페르조나

카테고리 없음 2020. 2. 3. 20:50

페르조나

페르조나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탈춤처럼 어떤 사람이 노인의 탈을 쓰면 그는 노인 역할을 하며 왕의 탈을 쓰면 왕이 되는 인간이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개의 탈을 썼다가 벗었다가 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에서 이 말을 고른 것입니다. 탈, 가면이라 하면 우선 도덕적인 위선을 연상할 사람이많겠으나 결코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탈이 탈을 쓴 사람의 개성이 아닌 것과 같이 페르조나라 하면 실상이 아니라 가상이라는 뜻도 포함됩니다. 페르조나는 집단정신의 한 단면입니다. 그것은 흔히 개성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가면 입니다. 사람들이 곧잘 나의 생각, 나의 신념, 나의 가치관,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코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남들의 생각, 즉 부모의 생각, 선생의 생각, 다른 친구들의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집단적으로 주입된 생각이나 가치관인데 마치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페르조나는 참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가 어떤 사람이 무엇으로 보이는 것에 대하여 서로 타협하여 얻은 결과입니다. 그는 어떤 이름을 받아들이고 칭호를 얻고 지위라든가 또 이것저것을 남에게 내보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이기는 하나 그 사람의 개성에 비추어 보아서는 이차적인 현실, 그 사람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많이 참여한 타협형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페르조나는 하나의 가상입니다. 농담삼아 규정하자면 이차원적 현실입니다. 융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령 그 많은 집단정신 가운데서 그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였는가에 개인적인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가 받아들인 것이 집단정신의 일부라는 점은 틀림이 없습니다. 페르조나는 내가 나로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남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나를 더 크게 착각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페르조나에 입각한 태도는 주위의 일반적 기대에 맞추어 주는 태도이며, 외계와의 적용에서 편의상생긴 기능성콤플렉스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환경에 대한 나의 작용과 환경이 나에게 작용하는 체험을 거치는 동안 향성됩니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페르조나에 해당하는 말은 체면, 얼굴, 낯과 같은 것입니다. 어른의 체면, 남편의 체면, 교육자의 체면, 선생의 체면, 숙녀의 체면 등 그것은 모두 어떤 사회집단이 그 집단의 특수한 성원에게 한결같이 요구하는 일정한 행동상의 규범이며 제복과 같은 것입니다. 체면이라는말을 사명, 역할, 본분, 도리 라는 말로 바꾸어도 같은 설명이 성립됩니다. 의사의 사명, 학생의 본분, 아들 된 도리, 주부의 역할이라고 할 때 이것은 그 개인의 살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기보다 일단 의사라는 사람, 학생 집단, 아들과 주부의 위치에 한정된 집단적 직업상과 그 지켜야 할 규범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히 봐올 낯이 없다. 얼굴을 들 수 없다. 어디다 낯을 들고 다니느냐는 등의 표현은 체면상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으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것이 그 개인의 갈 길, 그 개인이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일치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과 낯은 남에게 보이는 얼굴이며 낯이기 때문에 집단적인 일반적 윤리를 대변하는 하나의 가면입니다. 영동가법의 일반성을 표시할 때 모름지기 무엇이란 등의 말을 잘 씁니다. 남자란, 여자란 이래야한다고 할 때 그것은 페르조나를 강조하는 말이 됩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하고 시작하는 주장은 모두 그런 집단규법입니다. 국민 된 도리, 민족의 일원, 선배로서, 상사로서, 아랫사람으로서 할 때도 모두 페르조나의 차원을 말합니다. 페르조나는 집단공유의 보편적 원칙이기 때문에 때로는 어느 집단에만 적용되고 다른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 행동양식입니다. 인류학자나 문화정신의학자가 관심을 가지는 문화적 특수성 이라고들 부르는 것이 여기에 관련됩니다. 한국 사회는 특히 페르조나가 강조되는 사회이며 개인이 싫든 좋든 그것과 동일시하도록 강요하거나 어느 틈엔가 동일시되어 있어 진정으로 개성적인 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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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카테고리 없음 2020. 2. 2. 16:32

그림자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자기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말에 저 잘난 맛에 산다고도 합니다. 나는다 잘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못살게 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면 할수록 나는 나의 약점과 나의 결점을 못 보는 장님이 됩니다. 무의식 속에는 나도 모르는 또 하나의 나 가 있어 나도 모르게 나로 하여금 실수를 하게 해서 내가 지향하고 내가 주장하는 것과는 진혀 다른 모순된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 모순을 나중에 의식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자기가 모순을 감행하는지를 모르고 자기는 늘 정당하다고 믿는 경우도 많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바로 그림자를 두고 하는 명언입니다. 내가알고 있는 나만을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나만을 내세우면 마로 그 밑바닥의 나의 부분을 모르게 됩니다. 심리학적인 의미에서의 그림자란 바로 나의 어두운 면, 즉 무의식적인 측면에 있는 나의 분신입니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조명되면 될수록 그림자의 어둡은 짙어지게 마련입니다. 선한 나를 주장하면 할수록 악한 것이 그 뒤에서 짙게 도사리게 되며 선한 의지를 뚫고 나올 때 나는 느닷없이 악한 충동의 제물이 됨으로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게 됩니다. 정의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정의 수령에 자기도 모르게 빠지며 도덕적인 결백을 신조로 내세우는 사람이 성적인 추문을 일으키며 자유와 고매한 정산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권력과 금욕에 눈이 어두워 뭇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만을 하고자 하고 자기는 옳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쁜 것 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위선자 라든가 이중인적자란 바로 자기 마음속의 검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낮에는 점잖은 의사이나 밤마다 포악한 괴물로 변하는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연격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좋은 예입니다. 하이드는 의사 지킬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간설화에 나오는 많은 대극적 인물인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가짜와 진짜등 무수한 쌍들이 바로 인간정신의 의식성과 무의식성, 명과 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쌍은 보다 신화적인 차원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파우스트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니체의 초인 자라투스트라와 추악한인간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와 마귀에서 보듯이 모든 선하고 정의로우며 초인적인 존재의 악하고 추하며 비천한 반려자는 모두 그것의 그림자들입니다. 그림자는 의식의 바로 뒷면에 있는 여러 가지 심리적 내용으로 열등한 인격과 같은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창고에 내버려진 곡식이나 연장과 같은 것으로 오래두면 곰팡이가 피고 녹이 슬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될 기회를 잃었으므로 미분화된 새로남아 있는 원시적인 심리적 경향, 심리적 특징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외부의 대상에미숙하고 열등하고 부도덕하다는 등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림자를 자기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본래부터 그렇게 악하고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그늘에 가려 있어서, 다시 말해서 무의식 속에 버려져 있어분화될 기회를 잃었을 뿐이고, 그것이 의식되어 햇빛을 보는 순간, 그 내용들은 곧 창조적이며 긍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의 부정적 측면은 대개 상대적인 것입니다. 드물게 그림자가 긍정적인 측면을 띠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아의식의 좋은 면이 억압되었을 때이며, 이때 나는 스스로를 지나치게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좋은 것은 남에게만 있다고 믿는것입니다. 그림자는 흔히 외계에 투사되며 대개는 투사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그림자의 존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성서에 남의 눈의 티를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모른다 했거니와 그림자의 투사도 이와 비슷합니다. 투사란 물론 자아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되는 것이어서 자아는 단지 투사된 대상에 감정적으로 집착하게 됨으로 써 어떤 무의식적인 내용이 투사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혀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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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내용과 기능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참으로 깨단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무의식 또는 무의식적 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는 너무나 쉽게 그런 것은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런 것이 과연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가 없는가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는 것이 차리리 무의식의 존재를 인식하는 대 바각직한 태도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있다고 하니까 있고 없다고 하니까 없는것이아니고, 사람들이 그것을 스스로 경험해 봄으로써 비로소 그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의 개념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낸 말이 아니고 경험을 토대로 얻은 사실에분인 이름입니다. 그러나 경험이란 그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므로 같은 심리학 또한 같은 무의식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그 내용과 기능을 말할 때 견해 차이를 나타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무의식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은 퍽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과학의 대상으로 삼고 연구를 한 사람은 프로이트였으며, 그러한 무의식적인정신이 어떤 일정한 과정을 거쳐서 의식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노이로제 환자의 치료를 해가는 가운데 발견된 것입니다. 즉 히스테리 환자가 팔다리에 아무 까닭 없이 마비를 일으킬 때 그를 최면에 걸어 오래전에 겪은 마음의 상처이면서 지금껏 까맣게 잊어머리고있던 과거의 기억을 상기시켜 말하게 하니까 마비 증상이 없어지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의 증상은 의식에서 떨어져 나가 무의식의 내용이 되어 버린 체험군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신체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설명되었고, 무의식화한 그 체험내용은 대개 현실과 맞지 않기 때문에 억압된 것이며, 그것은 성적 욕망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처음에 생각하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사람들의 여러 가지 실수, 특히 말실수와 잊어버림, 공상, 그리고 노이로제나 각종 정신장애의 증상 가운데서 나타난다고 하며 그 표현을 또한 꿈에서 찾아보았고, 이런 생각은 그대로 융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그 내용이 프로이트가 강조한 성적 충동에서 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도덕적 갈등이나 그 밖의 많은 것이 무의식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았으므로 융에게 무의식은 보다 넓고 깊은 인간정신의 심층을 포괄하는 것이 됩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서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정신의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미지의 정신세계, 그것이 무의식입니다. 무의식이라는 말은 그런 정신계를 표현하는 데 썩 좋은 말은 아니지만 우선 그대로 쓰고 있고 이것을 미지정신계 또는 미의식 이라 불러도 상관이 없음은 앞에서 말한 바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자기도 모르는 어떤 것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가집니다. 의식의 개념이 처음으로 제창되었을 때 일어난 수많은 반발과 조소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하물며 그것이 성적으로 온당치 못한 욕구라 주장함에 있어서도아니고 그러한 것이 사실일진대 인간심리를 설명하는 데 구태여 그사실을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내 마음은 내가 더 잘 알고 남이 내 마음을 알 까닭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병을 일으키면 그때는 가족들이 네가 마음을 단단히 고쳐 먹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환자도 그렇게 믿고 여러가지 자가치료를 해봅니다. 그러니 심리학적인 치료, 즉 정신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노이로제의 증상은 이러한 상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해줍니다. 왜냐하면 환자가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 마음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쓸데없는 생각, 암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꼭 암에 걸린 것 같은 끊임없는 공포, 바보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꼭 3이라는 숫자를 외지 않고는 무슨 일을 시작할 수 없는 마음의 괴로움, 걱정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느닷없이 엄습하는 죽음의 불안, 이것들은 다 의식, 나, 의지 라는 것으로 이미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무엇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증거이며,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무의식의 작용이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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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의식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자그마한 섬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우리 정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 않으며, 그것은 극히 자그마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아란 그 자그마한 일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많은 콤플렉스 가운데의 하나로 보고 이를 자아 콤플렉스라고 부른다함이 전술한 바 있습니다. 자아 콤플렉스는 의식의 내용을 이루는 동시에 의식이 의식일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한데, 의식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심리내용이 자아 콤플렉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심리내용의 자아와의 관계성이 자아에 의해서 인지되지 않으면 그것ㅇ느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이란 자아에 대한 심리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이며 활동인 것입니다. 의식이란 마치 피부와 같은 표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밑에 끝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무의식이라고 부르지만 무의식이 얼마만큼 큰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이 무엇인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의식의 산물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유도하여 그것이 지닌 특징과 성질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의식의 입장에서 의식이 무의식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무의식적인 정신을 직접 탐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진정으로 무의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의식의 말로 표현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의식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 그 자체와 똑같은 것이라고 성급하게 단정을 내리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정신세계를 우리는 마치 그러한 것처럼 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융은 누차 강조했습니다. 자아가 그 중심인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단속적인현상이라고 융은 말합니다. 4분의 1, 3분의 1, 심지어는 인간생활의 2분의 1이 무의식적 상태에서 영위 된다고 합니다. 매일 밤 우리는 무의식 속에 잠기는데, 오직 아침에 깨어 저녁에 잠자기까지만 우리의 의식은 비교적 깨끗합니다. 그것조차도 얼마나 깨끗한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열 살 난 아이들은 당연히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 의식은 특이한 것이어서 마치 자아를 의식하지 않는 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융은 지적합니다. 열두 살, 열네 살경 아이들이 별안간 내가 여기 있다 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생에서 처음으로 그들 자신이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여러가지 추억이 담긴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나 라고 말할때 우리가 나 에 관한 충분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아직 단편적이어서 미래의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서 자아가 어떤 뜻을 가지는지 우리보다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라고 융은 말합니다. 의식은 넓은 무의식에 비해서 좁은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어진 순간에 몇 가지의 내용을 동시에 붙잡아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다른 것은 그 순간 무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세계의 연속성 있는 전체적 이해를 의식적인 순간의 계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의식이 좁기 때문에 정신의 전체상을 파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존재의 섬광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마치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는 것 같이 어느 특수한 순간만을 봅니다. 무의식은 거대하며 언제나 계속됩니다. 이에 비해서 의식의 영역은 순간적인 영상에 국한된 영역입니다. 의식은 다분히 외부세계에 관한 방향감각과 지각의 산물이라고 융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의미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나눌 때 의식은 대뇌에 국재하리라 추측됩니다. 대뇌는 외세포성 기원이며, 아마도 인류의 태곳적 조상들이 살던 시대의 피부의 감관기관 이었을 것이라고 봄으로써 무의식의 자율적 기능을 축소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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