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의식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의식은 자그마한 섬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은 우리 정신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 않으며, 그것은 극히 자그마한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아란 그 자그마한 일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많은 콤플렉스 가운데의 하나로 보고 이를 자아 콤플렉스라고 부른다함이 전술한 바 있습니다. 자아 콤플렉스는 의식의 내용을 이루는 동시에 의식이 의식일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한데, 의식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심리내용이 자아 콤플렉스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심리내용의 자아와의 관계성이 자아에 의해서 인지되지 않으면 그것ㅇ느 의식이 아니고 무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이란 자아에 대한 심리적 내용의 관계를 유지하는 기능이며 활동인 것입니다. 의식이란 마치 피부와 같은 표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밑에 끝없는 미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볍게 무의식이라고 부르지만 무의식이 얼마만큼 큰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이 무엇인지 사실상 아무것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의식의 산물로부터 우리는 어떤 결론을 유도하여 그것이 지닌 특징과 성질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의식의 입장에서 의식이 무의식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무의식적인 정신을 직접 탐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진정으로 무의식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의식의 말로 표현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의식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 그 자체와 똑같은 것이라고 성급하게 단정을 내리는 것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정신세계를 우리는 마치 그러한 것처럼 본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융은 누차 강조했습니다. 자아가 그 중심인 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란 단속적인현상이라고 융은 말합니다. 4분의 1, 3분의 1, 심지어는 인간생활의 2분의 1이 무의식적 상태에서 영위 된다고 합니다. 매일 밤 우리는 무의식 속에 잠기는데, 오직 아침에 깨어 저녁에 잠자기까지만 우리의 의식은 비교적 깨끗합니다. 그것조차도 얼마나 깨끗한지는 의문스럽습니다. 열 살 난 아이들은 당연히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만 그 의식은 특이한 것이어서 마치 자아를 의식하지 않는 의식과 같은 것이라고 융은 지적합니다. 열두 살, 열네 살경 아이들이 별안간 내가 여기 있다 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의 생에서 처음으로 그들 자신이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여러가지 추억이 담긴 과거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나 라고 말할때 우리가 나 에 관한 충분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아에 대한 인식은 아직 단편적이어서 미래의 사람들은 인간에 대해서 자아가 어떤 뜻을 가지는지 우리보다도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라고 융은 말합니다. 의식은 넓은 무의식에 비해서 좁은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어진 순간에 몇 가지의 내용을 동시에 붙잡아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모든 다른 것은 그 순간 무의식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세계의 연속성 있는 전체적 이해를 의식적인 순간의 계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의식이 좁기 때문에 정신의 전체상을 파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존재의 섬광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마치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는 것 같이 어느 특수한 순간만을 봅니다. 무의식은 거대하며 언제나 계속됩니다. 이에 비해서 의식의 영역은 순간적인 영상에 국한된 영역입니다. 의식은 다분히 외부세계에 관한 방향감각과 지각의 산물이라고 융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리적인 의미에서 의식과 무의식을 나눌 때 의식은 대뇌에 국재하리라 추측됩니다. 대뇌는 외세포성 기원이며, 아마도 인류의 태곳적 조상들이 살던 시대의 피부의 감관기관 이었을 것이라고 봄으로써 무의식의 자율적 기능을 축소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